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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술에 얽힌 풍속 · 속담 · 고어성어 (1)
관리자
2012/06/26 7885
 술에 얽힌 풍속 · 속담 · 고어성어 (1)



 가. 술에 얽힌 풍속

1) 차갑게 마시는 술

 『규합총서』에 “밥먹기는 봄같이 하고, 국먹기는 여름같이 하며, 장(醬)먹기는 가을같이 하고, 술먹기는 겨울같이 하라”는 말이 있다. 다시말하면 밥은 따뜻한 것이 좋고 국은 뜨거운 것이 좋으며 장은 서늘한 것이 좋은데 반하여 술은 특히 찬 것이 좋다는 것을 가리킨 말이다.

 세시풍속에서 보더라도 정월 원일(元日)에는 세주(歲酒)를 마셨는데 반드시 냉주(冷酒)를 마시고 정월 대보름날에는 이명주(耳明酒)로 청주 한 잔을 차게 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시는 풍속이 있었다. 이렇게 하면 기쁜 소식이 들리고 노인은 귀가 밝아지게 된다 하여 ‘귀밝이술’이라고 한다『동국세시기』. 이것이 벌써 술을 차게 마시는 풍속을 말해 주는 예이다. 이렇게 술을 차게 해서 마시는 풍습은 서양에서도 있는데 서양에서는 술잔에 얼음을 집어넣어 술의 농도를 약하게 하면서 술을 차게 만들지만 우리 나라의 술은 차가운 우물물이나 흐르는 냇물에 술병을 담가 두었다가 마시므로 농도가 약해지지 않은 채로 마실 수 있다.

 2) 술독 간수하기

 『음식디미방』에 따르면 술독을 고를 때는 잘 구워진 것을 고르며 술을 담기 전에 독 안팎을 깨끗이 씻고 청솔 가지를 독 속에 가득히 넣은 다음 끓는 물을 솥 위에 거꾸로 엎어서 얹고 불을 오래 때서 더운 김으로 술독 속을 소독한 후에 써야 술맛이 좋다고 하였다.

 김치나 장 등을 담아 두었던 독은 냄새가 날뿐더러 술이 발효할 때 해로운 균이 작용하여 술맛을 그르치기 쉽다. 이런 독은 여러 날 우려서 솔가지를 넣고 쪄서 썼다. 독을 소독하는 또 한가지 방법으로는 지푸라기 덤불을 태워 그 연기가 독 안에 가득 들어가도록 엎어놓았다가 식은 다음에 마른 수건으로 안팎을 잘 닦아 불티나 그을은 것이 없도록 해서 썼다.

 술을 빚은 독은 추운 때는 짚을 엮어 독 몸에 입히고 독 밑에는 두꺼운 널빤지를 깔아야 구들이 더워도 온기가 오르지 않아 좋다고 하였다. 술독에 특히 족제비가 근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일 족제비가 술독에 앉으면 저절로 달아나기를 기다려야 하였다. 몰아내거나 잡으려고 하면 족제비가 다급해서 방귀를 뀌게 되는데 몇 달이 가도 이 방귀 냄새가 가시지 않기 때문에 술맛을 잃게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술독을 잘 간수하여 독 안에서 술이 익으면 술독을 두들겨 보아 술맛이 좋을지 나쁠지의 여부를 가늠해본다. 잘 익어 술맛이 좋은 술독은 소리가 맑고 길게 울리며 소리가 탁하고 짧으면 술맛이 좋지 않다. 소리가 조금도 울리지 않을 때는 술은 아직 익지 않은 것이다. 술이 잘 익었는지 설익었는지는 성냥불이나 촛불로 시험하기도 하였다. 불을 켜 독 안으로 넣어 비쳤을 때 익지 않은 술은 불이 꺼지지 않고 술이 잘 익었으면 불이 붙는다. 이런 판별법은 지금까지도 전하여지고 있다.

3) 술이 사람을 안다.

 술은 개인의 인격을 나타내고 크게는 나라의 정치와 법을 알 수 있는 매개체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사람인 이덕무는 그의 저서 『사소절』에서 “훌륭한 사람은 술이 취하면 착한 마음을 드러내고, 조급한 사람은 술이 취하면 사나운 기운을 나타낸다”라고 적혀 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술이 사람을 안다”고도 얘기를 한다.

 사위를 얻을 때 장인이 사위 될 사람을 불러 대작해 보는 것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색시 집에 시험을 치르러 가는 사윗감은 아무리 많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려고 집에서 소금 한 숟갈을 먹거나 붕사(硼砂) 가루를 먹고 떠난다. “술 마시기 전에 소금이나 붕사 가루, 미나리 강즙을 마시면 술에 취하지 않게 된다”는 민간 예방책이 전하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술을 마시는 양이 많으면 도량이 클 것이라는 관념으로 인하여 대주가가 되기를 원하여 팥꽃과 그 잎을 백일간 그늘에서 말려 가루로 만들어 매일 한 숟갈씩 더운물에 타서 마셨다. 그러면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대주가가 되기 때문이다(유태종 1977). 이런 풍습과 관념은 지금껏 전하여지고 있다.

4) 술잔 돌리기

 조선 후기에 담배가 전래되면서 술과 담배는 한국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기호품이 되었다. 술은 제천 의식에 사용되는 제물이 되기도 하지만 혼례, 관례 및 상례에 쓰이는 요긴한 식품이기도 하다. 혼례 때에도 신랑이 든 술잔을 받아 신부가 마셨다. 제사때에 쓴 술은 나누어 마셔야 한다고 하여 참석자가 돌아가면서 음복(飮福)의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술을 마실 때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여 술잔을 돌리는 풍습이 있다. 우선 술잔을 돌리는 풍습이 독특하다. 자기가 받은 잔을 비우면 곧 그 술잔의 임자에게 다시 잔을 돌리는 것이다. 혹은 애초부터 좌석에 잔을 하나만 놓고 이것을 순서대로 돌아가며 권하는 풍습도 없지 않다.

 중국 사람들도 우리 나라 사람만큼 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잔을 돌리는 일이 없다. 또 일본 사람들은 자작(自酌)하는 것이 보통이고 혹 권하더라도 각자의 잔에다 술을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술잔을 돌려 권하는 풍습은 여러 가지 무리를 낳기도 하지만 그런대로 우리의 관습으로 오랜 전통을 지녀온 것이다.

 5) 주주객반(主酒客飯)

 원래 ‘주주객반’이란 주인은 손님에게 술을 권하고, 손은 주인에게 밥을 권한다는 말로, 술에 독을 타지 않았다는 증거로 주인이 먼저 한 잔 들고 손에게 권하는 예법에서 이루어진 말이라 한다. 이 말이 사용되게 된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술을 대접하는 우리 풍속의 일단에서 쓰여온 말임에는 틀림없다.

 조선시대에 쓴 『여사서(女四書)』 권 2에 ‘대객장(待客章)’에도 밥과 함께 술을 내며 객이 하직하고 갈 때도 이별하는 술을 내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이 차를 내어 손님을 대접하듯 우리 나라는 술을 더 일반적으로 사용하였으며 또 자기 집의 비방으로 빚은 술을 자랑으로 여겼다.

 옛부터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말이 있다. 북촌의 부귀한 고장에서는 일반으로 음식 사치가 대단하여 그 솜씨가 발달하였는데 남산 밑 구차한 샌님들과 시세없는 호반(虎班)네들은 술 솜씨가 높았었다 한다(강인희).

 이렇게 술이 손님 대접에 없어서는 안되는 음식이었다. 한 가난한 선비의 집에 손님이 오자 그 아낙은 술을 살 돈이 없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술을 사오다 돌에 부딪혀 술을 엎지르고 울었다. 지나가는 과객이 그리 슬피 우는 까닭을 물으니 내 머리카락을 자른 것은 아깝지 않으나 술을 엎질러 손님을 대접하지 못하게 되어 안타까워 운다고 하였다는 만남까지 있을 정도이다.  

 6) 술떡과 외상술

 막걸리를 빚으려면 찹쌀이나 멥쌀을 씻어 지에밥을 찐다. 이 지에밥 찐 것을 술떡, 술제떡이라 한다. 술떡은 햇볕에 말려서 꾸덕꾸덕해지면 술을 빚으므로 술떡 말리는 것을 보면 그 집에서 술을 빚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종(哲宗) 때 술떡에 얽힌 정수동(鄭壽銅)의 이야기가 있다. 돈이 없어 외상술을 잘 마시던 수동이 어느 해 세모(歲暮)가 되어 적적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단골 술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안주인은 섣달 그믐께라 외상을 거절하고 말았다. 마침 마당에는 술을 빚으려고 술 지에밥을 쪄서 멍석에 널어놓았다. 그것을 본 정수동은 술 생각이 더 간절했다. 사랑 툇마루에 앉아 있는 수동은 안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때마침 우리에서 돼지 한 마리가 뛰어나와 술떡을 마구 먹기 시작했다. 나중에 주인이 돼지를 쫓지 않은 수동을 나무랄 수 밖에. 능청스런 수동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오? 돼지는 맞돈을 내고 먹는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듣고 주인은 외상술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유태종, 1977).

 7) 음주 금기(飮酒禁忌)

 『용재총화(傭齋叢話)』에는 “하루의 환(患)은 묘시(卯時 : 오전 8시경)때 먹은 술이고, 1년간의 걱정은 작은 신(靴)이며 일생의 걱정은 악처를 취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아침 일찍이 마시는 술을 금한 것이다.

 금주에 대한 경계와 함께 조선 후기에는 술 먹은 다음에 금해야 할 음식 금기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규합총서』에 따르면, 음주 후에 금해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술꾼(酒客)의 병은 계지탕(桂枝湯)을 먹지 못하는 법이니 양기(陽氣)를 얻은즉 반드시 토한다. 그렇기 때문에 술꾼은 단맛을 즐기지 않는다. 막걸리를 먹고 국수를 먹으면 기운 구멍(氣孔)이 막히고 취한 뒤 바람맞이에 누우면 하초(下焦)가 잘못 된다. 술 마신 뒤 목이 몹시 마르더라도 찬물을 먹지 말아야 하니, 찬 기운이 방광에 들어가면 수종(水腫), 치질, 소갈증이 생긴다. 홍시, 황률, 살구, 버찌, 조기 등의 음식은 상극이니 먹으면 안된다. 탁주를 먹고 쇠고기를 먹으면 촌백충이 생기고 더운 고기를 먹고 즉시 냉수를 먹으면 충이 생긴다.

8) 해장국과 해장술

 술의 문화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해장국과 해장술의 풍속이다. 주막에서는 첫새벽에 찾아오는 손님을 위하여 해장국을 끓여 준비한다. 해장국은 혹 ‘해정(解酊)국’이라 하여 숙취를 푸는 국의 뜻이라고도 한다. 해장국은 소의 뼈를 푹 고은 국물에 우거지와 선지를 넣고 끓인 별미 토장국의 하나이다. 첫새벽 장터 가까이에는 밤을 지새우며 찾아 들어온 장사꾼이 있고 지난 밤 술을 마시며 지새운 술손님들이 많다.

  주막집 부뚜막에 걸린 큼직한 쇠솥에는 선지덩이가 푸짐하게 섞인 해장국이 펄펄 끓고 땅에 묻은 술독에는 해장술이 가득하다. 소박한 아낙이나 주인을 찾아온 손님을 마치 가까운 친지를 대하듯이 반기면서 손님이 청하는 대로 큼직하고 두둑한 뚝배기에 해장국을 듬뿍 떠서 대접한다. 여기에 밥과 장아찌, 깍두기가 함께 차려지기도 한다.

 해장술은 이 해장국을 안주로 하여 먹는 것으로 술을 먹은 후 해장을 위해 마시는 술이다. 술을 술로써 다스리는 점이 특이하다. 술의 발달로 술을 마신 후 먹는 이런 해장술과 해장국이 나오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9) 상둣술에 낯대기

 장례식이 거행되면 꽃상여를 메는 상여꾼(상두꾼)이 오게 된다. 상여꾼은 고기와 술을 푸짐하게 대접받지 않으면 행패가 심하여 음식은 물론 돈까지도 요구하는데 청하는 대로 주어야 하는 것이 풍속이었다. 특히 장지(葬地)가 멀 때는 며칠 몇 날 상여꾼이 걸어야 했으므로 때때로 내놓아야 하는 음식에 대단한 비용이 들었다. 그러나 남의 술이나 남의 쌀밥으로 후하게 대접하여 벗을 만들 수 있었기에 “상둣술로 벗 사귄다”, “상둣술에 낯대기”라는 속담이 생겼다.

 상여꾼들은 시체를 운반하는 일을 맡은 천한 사람들로, 신분상으로는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초상난 집에서 상여꾼을 위하는 양은 “장모 사위 위하듯 한다”고 할 정도로 극진하였다. 보통 때는 천민으로 지내다가 이렇게 상가에 오면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울분 해서의 장으로서 상가에 행패부리기를 예사로 한 듯 하다. 또 상여를 메고 가면서도 죽은 이의 노자가 없어 더 이상 발을 뗄 수 없다 하며 뜯어내는 노잣돈이 무척 많아 병폐를 이루기도 하였다.

10) 금주령

 술은 기호품으로 뿐만 아니라 사용처가 많아 식생활의 필수품이라고 할 만하였다. 각종 제사, 의례는 물론 손님 대접을 위해서도 반드시 술을 사용하였다. 그러기에 ‘금주령’이 내려지면 밀주를 만드는 풍습이 전국을 휩쓸었으며 주막같이 술을 파는 곳에서는 밀주를 밀매하기도 하였다.

 밀주는 몰래 마시는 것이겠으나 금주령 아래에서도 술을 떳떳이 마실 수 있는 기회는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금주령이 내리면 권력자는 어떤 핑계로든 이를 면하고, 백성들만 걸려들어 민원(民怨)이 높았다. 이 것으로 미루어 금주령 아래서 특권 계급은 청주를 약효주(藥酵酒)인양 사칭하면서 마시고 더욱 나아가서는 좋은 술인 청주를 약주라고 해버린 것이다(이성우, 1978).

 18세기만 해도 1733년, 1756년에 금주령이 내려졌다. 1734년에는 전국에 기아민이 71,9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 1756년(영조 32년 丙子)에 내려진 금주령은 12년 뒤인 1767년(丁亥)에 풀렸으니 당시 식생활의 사정을 알 만하다. 이 때의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은 중국에 가서도 국가의 금주령에 따라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셨다는 일기가 보인다(김태준, 1982).

 이러한 예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 가뭄으로 여러번 금주령이 내린 일이 있은 후부터 금주령 아래서 이를 어기는 핑계로 약주가 비밀리에 유행하기도 했다. 또 금주령 가운데서도 명절날, 결혼식, 제사 등에는 금주령을 발한 조정에서도 어느 정도 음주를 묵인하였으므로 떳떳하게 술을 마셨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술은 대개 멥쌀이나 잡곡으로 빚었기 때문에 절약을 필요로 하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였다. 천재지변이 생겼거나 국상이 있을 때에도 금주령이 내렸다. 그러나 제사를 존중히 여기는 우리 나라인 만큼 제주(祭酒)만은 용서하여 주었다. 제사 때 음복의 절차에 따라 제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술을 나누어 마실 수 있으나, 금주령이 가장 엄격한 때에는 제상(祭床)에까지도 금했다는 기록이 있다.

11) 술이 있는 손님상

 “손님이 끊기면 그 집안 인심이 나쁘다”하고 지나는 과객이라고 재워 주고 먹이지 않으면 안주인 사람 됨됨이가 인색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항시 손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주부에게 손님이란 그리 반가운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손님상에는 술이 올라가 있어야 됨은 당연하나 손님 대접용 술은 대개 안주인이 집에서 손수 담아 내는 것을 예절로 삼아 술의 제조법이 또한 뛰어나고 술 종류의 발달을 낳게 되었던 것 같다. 『해동가요(海東歌謠)』에도 술대접의 풍속을 알려주는 시조가 있다.



 

    술 있으면 벗이 없고 벗이 오면 술이 없나니

    오늘은 무슨 날로 술이 있자 벗이 왔네

    두어라 이난 병이니 종일 취를 하리라.

  

 속담에 “한 잔 술에 눈물 난다”, “한 잔 술에 인심 난다”라는 말이 있다. 손님을 대접할 때 사람마다 박하게 대접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서로 불편한 사이가 되기도 하니 손님 대접에 각별히 신경을 쓸 것을 부녀자들에게 경고하는 말이다.

 박두세(朴斗世)의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에는 충청도에서 있었던 조선 후기의 손님 대접 풍속을 만화경적으로 비판해 주고 있다. 손님 접대의 식단을 3등급으로 만들어 손으로 턱을 만지면 가장 조잡스러운 상차림을 내고 코를 만지면 중간 상차림을, 이마를 만지면 가장 좋은 상차림을 내는 집안이 있었다 한다. 그래서 이를 눈치채고 골탕을 먹인 이야기가 있다(김동욱).

 이와 비슷한 것으로 수염의 어디를 쓰다듬는가를 보아 상차림의 경중을 판단했다는 주부의 이야기도 있어, 손님접대로 인한 우스운 일화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석학자로 칭송되는 우암(尤庵) 선생도 『손 접대하는 도리』라는 『계녀서』의 한 장에서 다음과 같이 훈계하고 있다.

 내 집에 오는 손님이 원래 친척이 아니면 지아비의 벗이요, 시족의 벗이라. 음식 잘하여 대접하고 실과나 술이나 있는 대로 대접하되 손이 잘 먹지 못하여도 박대요, 지아비 나간 때는 종시켜 만류치 아니함도 박대니 일가를 청하여 주인노릇하고 일가 사람이 없으면 마을집 주인을 잡아 주고 잘 대접하여 보내라. 한 번 두 번 박대하면 그 손이 아니오며 다른 손도 아니 오리니 손이 아니 오면 가문이 자연 무식하고 지아비와 자식이 나가서 주인 할 일 없을 것이니 부디 손 대접 극진히 하라. 옛 부인은 달구를 팔아 손을 대접하고 자리를 썰어 말을 먹였으니 요사이 부인네는 손이 왔다 하면 싫어하고 지아비나 자식이나 어디 가서 잘 먹었다 하면 그는 기뻐하니 부디 명심 경계하여 잘 대접하되 인심이 부귀한 손이 오면 조심하여 잘 대접하고 빈천한 손이 오면 허술한 대접하니 이는 덕불한 행실이라. 노소는 분간하여 대접하려니와 귀천과 빈부는 분별치 말라(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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